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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의 물건


정현실 집사

사람들마다 추억이나 어떤 생각들을 불러일으키는 매개체가 있다. 냄새나 소리일 수도 있고 장소나 음식, 혹은 물건일 수도 있다. 요즘 한국에서 인기있다는 문화심리학자, 김정운씨가 쓴 [남자의 물건]이라는 책을 읽었다. 제목은 좀 발칙하지만 내용은 사회각계 저명인사들의 사연이 있는 물건을 소개하고 약간의 심리학적 해설을 덧붙인 것이다. 그중 인상적인 것이 몇가지 있었는데 글쓴이 본인의 물건인 만년필, 그리고 이어령씨의 책상이었다. 아마도 그것들이 그들의 아버지와 관련된 물건이고, 나 자신에게도 의미 있게 여겨지는 물건이어서였는지도 모른다.

저자가 소중히 여기는 만년필은 그에게 아버지를 상징한다고 했다. 커다란 존재감에 어렵기만 하던 아버지가 쓰시던 은색 만년필을 어린 시절부터 몹시 부러워했고, 어른이 되어 자기도 원하는 만년필을 가질 수 있게 되자 그 자신도 공들여 잉크를 채우고 쓰는 사람의 필체에 따라 길이 드는 만년필을 사랑하게 되었고, 아버지의 것과 똑같은 파커 만년필을 선물받고 참 기뻤다고도 한다. 그리고 이토록 아날로그스러운 만년필로 자기가 좋아하는 수첩에 글을 쓰면서 그 자신 이제 두 아들의 아버지로서 자기의 아버지와 가까워진 것 같고, 이해하게 된 것 같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어령씨의 물건인 책상, 그는 고령에도 불구하고 여러 개의 컴퓨터를 사용하여 자료를 점검하며 활발히 글을 쓴다. 저자의 표현을 따르면 서재의 책들과 책상 위에 도열한 여러 대의 컴퓨터들 앞에서 그것들을 명령하는 사령관 같다고 한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어령씨 자신에게 있어 책상은 자기 자녀들에 대한 미안함이고 동시에 그 미안함을 상쇄하는 곳이라고 한다. 아이들이 어릴 적에 같이 시간을 보내주지 못하고 늘 책상에 앉은 아버지의 뒷모습만 보여주며 살았던 것이 미안해서 아이들이 다 떠난 지금도 더 열심히 글을 쓰고 공부할 수밖에 없는 곳이라고 한다.

나는 책을 읽다가 아빠 생각이 났다. 아빠는 지금 생각해도 참 멋쟁이셨는데 정작 넥타이를 매는 정장을 입으신 건 생전에 딱 2번, 부모님의 오래된 결혼식 사진 속에서, 그리고 내 결혼식 때에 뵈었다. 그런데도 나는 고운 빛깔의 천으로 잘 만들어진 셔츠를 보면 아빠 생각이 난다. 왜냐하면 아빠는 다른 사람들에게 셔츠를 맞춰주는 일을 하셨기 때문이다. 나의 어릴적 기억 속엔 시내에서 작은 셔츠 맞춤점을 하시던 아빠 가게에 가면 색색의 고운 셔츠용 천들이 곱게 진열되어 있고, 손님이 오면 사이즈를 재고 천을 고르고 칼라와 소매 커프스의 모양을 정하고 주문서를 적곤 하시던 젊은 아빠가 계시다. 정작에 아빠는 정장보다는 스포츠 코트에 색이 예쁜 셔츠를 입으시고, 겨울엔 작은 체크무늬 블레이저에 스카프를 두르시거나 터틀넥 스웨터를 받쳐 입으시고 늘 좋아하시던 트렌치코트를 걸치곤 하셨다. 그래서 좋은 셔츠나 예전에 아빠가 즐겨 입으시던 것과 비슷한 옷들을 보면 자연스레 아빠를 떠올리곤 한다. 사실 아빠가 일생을 그 일만 하셨던 건 아닌데도 불구하고 나는 늘 셔츠를 보면 그게 아빠의 물건이라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그리고 나에게 의미있는 물건이 무얼까 생각해보니 금세 떠오르는 물건들이 있었다. 사람들이 내게 좋아하는게 무언가 물을 때면 망설임 없이 ‘글과 그림’이라고 말하는 나에게 특별한 물건은 마술처럼 글을 술술 써줄 것 같은 내 이름이 새겨진 초록색 만년필과 내가 눈으로 보는 세상의 아름다운 것들과 기억 속에 담아두고 싶은 순간들을 담아 그림을 만들어주는 카메라, 그리고 중학교 1학년 때 기드온 협회에서 받았던 파랑색 표지의 신약성경인데 나의 첫 성경책이고 아직도 가지고 있다. 둘째 아이가 가끔은 사진 찍을 때 엄마가 멋있다고 말해주는데 그 말을 들으면 괜히 기분이 좋다. 그래서 나중에라도 이왕이면 방 치우라고 잔소리하던 엄마보다는 아이가 멋있다고 말해주던 그 모습으로 그렇게 기억해주면 좋겠다.

아마 당신에게도 그런 물건이 있을 것이다. 혹시 없다면 이제부터라도 만들어보길. 그러나 어떤 물건이 당신의 것이 되려면 필요한 건 그 물건을 살 돈만이 아니다. 그 물건이 당신을 설레게 하고, 그 물건이 당신을 표현해주고, 그물건이 진짜 당신의 것이 되려면 시간과 관심과 과정이 필요하다. 비싼 물건을 사서 고이고이 모셔둔다면 그건 당신의 물건이 아니다. 당신의 손때가 묻을만큼 당신의 관심과 익숙해지는 과정의 모든 시간들로 인해 그것은 당신의 물건이 되는 것이다. 당신이 남자이건 여자이건 당신을 설레게 하는 의미있는 물건이 있는가? 당신의 아이가 그 물건을 보고 당신을 기억할 그런 물건을 당신은 가지고 있는가? 당신의 사랑하는 사람들이 당신의 무엇을 기억하길 바라는가? 당신의 타던 차, 골프성적, 티비프로, 당신이 즐기던 술이나 담배, 버릇처럼 내뱉던 한마디 욕으로 기억되길 원하는가? 이왕이면 책을 읽던 당신의 모습, 오랫동안 많이 보아서 반질해진 성경책, 기도하느라 무릎꿇은 뒷모습, 화려하고 고급스럽지 않아도 특별한 당신만의 스타일, 진심이 담긴 편지, 담담한 낡은 사진 한장, 정성스레 키우던 화분, 정갈하고 맛깔스런 한그릇의 음식으로 기억된다면 좋겠다. 사람에겐 물론이거니와 천국에서의 나의 모습이 온전히 하나님의 기억하심을 따른다고 하니 하나님의 기억하심 속에 나는 더욱 그랬으면 좋겠다.

글쓴이: 정현실 집사, 워싱톤감리교회 MD
올린날: 2012년 6월 20일 연합감리교회 공보부 T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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