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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눔에 대한 요한 웨슬리의 견해

(이 기사는 연합감리교회 인터프레터 매거진 7, 8월 이슈에 개재된 내용을 번역한 글 입니다.)

청지기직 (stewardship)은 웨슬리언 부흥의 중심을 차지한다. 요한 웨슬리는 이를 그리스도인의 제자도에 빼놓을 수 없는 요소로 여겼다. 청지기직은 그의 설교나 개인적인 실천에 일관되게 나타나는 주제였다. 금전적인 자원을 기부하는 것은 웨슬리의 속회나 신도회 (societies)의 모든 구성원들에게 필수적인 영적 훈련이었다. 웨슬리가 생각하기에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라는 계명을 지키지 않아도 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나눔은 바로 그 사랑의 표현이었다.

웨슬리와


그의 인생의 말년이 가까워오면서 웨슬리의 설교와 글에는 "감리교인으로 불리는 사람들"의 미래를 점점 더 염려하는 듯 보인다. 감리교 운동은 영국에서 약 오만 명으로 수적으로 강세였으며, 새로운 미국의 교회는 빠르게 성장하는 중이었다. 하지만 웨슬리는 쇠퇴의 징표를 보았다. 영국 전역의 감리교 활동을 둘러본 여행은 웨슬리를 의기소침하고 염세적으로 만들었다.

1786년 8월 4일, 그는 이렇게 썼다. "나는 감리교인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유럽이나 아메리카에서 사라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오히려 나는 그들이 단지 능력 없는 종교의 형식만을 가진 일종의 죽은 종파로 존재하게 될까 두려워한다. 만약에 그들이 처음 출발할 때 가졌던 가르침과 성령과 신앙훈련을 모두 견고하게 붙잡지 않을 경우에 이런 일이 일어날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웨슬리에게 불 보듯 분명한 위협은 점점 부유해지는 감리교인들의 부유함이었다. 그는 기독교는 내부에 자체적인 소멸의 씨앗을 품고 있다고 믿었다. 제자도는 우리를 더욱 부지런하고 검소하게 만들고, 우리가 더욱 부지런하고 검소해질수록 부가 증가하게 마련이다.

웨슬리는 부 그리고 나눔에 실패하는 것이 기독교 전반에 위협을 주며, 특히 감리교 운동에 가장 심각한 위협이라고 간주했다. 1789년, 웨슬리는 감리교인들이 모든 것을 가졌지만, 약 30년 전 출판된 자신의 설교 "돈의 사용법"의 세 번째 요점을 무시해 버렸다고 기록했다.

" 가지 제시된 원리들 가운데서 여러분들은 많은 사람들이 번째 원리인 ' 있는 대로 많이 벌어라" 지키는 것을 보았을 것입니다. 소수의 사람들이 번째 원리인 ' 있는 대로 많이 저축하라' 지키는 것을 보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번째 원리, ' 있는 대로 많이 주어라' 지키는 사람을 얼마나 많이 보셨습니까? 5 명의 감리교인들 중에 이를 지키는 사람이 오백 명이 있다고 믿을 만한 이유가 당신에게 있습니까? 그러나 아직도 번째 없이 번째 원리만을 지키는 사람들이, 어느 때보다 많아진 지옥의 자녀들보다 족히 배가 되리라는 사실만큼 분명한 것은 없습니다."

나눔에 대한 웨슬리 자신의 헌신은 일생 동안 한결같았다. 옥스퍼드 대학생 때 그는 일 년에 28파운드로 생활을 했다. 수입이 30파운드로 늘고 연간 소득이 120파운드에 이르렀을 때도, 그는 여전히 전과 같이 28 파운드로 생활을 했다. 그는 사람들에게 만일 자기가 죽을 때 수중에 10파운드가 넘게 남았으면, 자기를 강도로 불러도 된다고 말하였다.

(wealth) 대한 웨슬리의 원리들


웨슬리는 1786년 "감리교리에 대한 생각들"에서 이렇게 적었다;

"…감리교인은 어디서나 부지런하고 검소하다; 결과 그들은 재물을 축적하게 된다. 그에 비례하여 자존심, 분노,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도 커져간다. 그래서 혹여 종교의 모양은 남지만, 정신은 재빨리 사라지고 만다.

"…그러면 과연 (나는 재차 묻는다) 무슨 방도를 취해야, 우리의 돈이 우리를 지옥에 빠지도록 만들지 못할 것인가? 여기에는 가지 방법이 있는데, 하늘 아래 다른 방법은 없다. 만일 ' 있는 대로 많이 벌어라' ' 있는 대로 많이 저축하는' 사람들이 그와 마찬가지로 ' 있는 대로 많이 주어라' 지킨다면, 많이 벌수록, 그들은 더욱더 은혜 안에 자랄 것이며, 더욱더 많은 보화를 하늘에 쌓게 것이다."

웨슬리의 '돈의 사용법'이라는 설교는 우리에게 유용한 출발점이다. 여기에 담긴 원리들은 그의 신학, 윤리, 그리고 선교를 논의할 때 빼놓을 수 없다.

" 있는 대로 많이 벌어라" (Earn all you can)
우리에게 과연 '할 수 있는 만큼 벌어라' 라는 충고가 필요한가? 그러나, 웨슬리는 적극적인 획득을 신학 이론으로 해석하려는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하나님의 치유 하시고, 이 세상에서 창조하시는 역사에 동참하면서, 할 수 있는 만큼 많이 벌라고 강조하였다. 그의 설교는 자신 그리고 타인과 피조물에게 상처를 주면서 파괴적인 방법으로 돈을 버는 데 대한 논쟁이었다. 그는 타인을 착취하는 것이나 타인과 자신에게 고통과 아픔을 주면서 돈 버는 것을 제한하였다. 웨슬리 전통에서 나눔은 단지 우리가 획득한 부를 어떻게 사용하는가가 아니라 우리가 어떻게 부를 획득하는가도 중히 여긴다.

" 있는 대로 많이 저축하라" (Save all you can)
웨슬리는 축적과 쌓아두기를 찬성하기보다, 이에 대해 도전을 던진다. 그는 감리교인에게 현명하게 투자하고 저축 계정에 많은 돈을 넣어두라고 하지 않았다. 그는 그런 풍습을 "돈을 바다에 던지는 것"과 같다고 했다.

"할 수 있는 만큼 저축하라"는 격언은 단순한 삶의 방식으로의 부름이며, 또한 사치, 부유, 그리고 자기만족에 대한 경고이다. 웨슬리는 우리에게 불필요한 모든 것은 가난한 자들의 피에서 짜낸 것이라고 생각했다. 앞서 말한 가난한 사람들이 살게 하며 획득한 부는 나눔의 일종이다.

우리는 그저 다른 사람들이 살도록 내 삶을 단순화할 용의가 있는가? 청지기직은 우리가 무엇을 기꺼이 얻게 될지 확실하지 않은 채 우리가 무엇을 기꺼이 할 것인가와 관련이 있다.

" 있는 대로 많이 주어라" (Give all you can)
청지기직에 대한 웨슬리의 세 번째 원리는 처음 두 가지 원리에 의미를 부여해 준다. 우리는 할 수 있는 만큼 많이 줄 목적을 두고, 할 수 있는 만큼 많이 벌고, 할 수 있는 만큼 많이 저축해야 한다. 웨슬리에 따르면, "어리석은 욕망에 탐닉하거나 육체의 정욕이나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을 채우는 데 사용할 뿐인 모든 경비를 줄여서 할 수 있는 만큼 많이 저축하라. 아무것도 낭비하지 말라… 자기든 자기 자식을 위하는 죄나 어리석은 행동에... 그래서 할 수 있는 만큼 많이 주어라. 다른 말로 하자면,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을 하나님께 드리라" 수입, 저축, 기부는 모두 하나님께 자신을 드리는 수단이다!

웨슬리에게 나눔은 하나님의 본성과 활동에 뿌리를 두고 있다. 그분의 본성은 사랑이시기에 다른 사람들을 위해, 생명을 주기 위해, 풍성하고 온전한 삶을 주기 위해 자신을 비우셨다. 은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인류에게 부어주신 하나님의 엄청난 무조건적 사랑, 하나님은 바로 그런 분이시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향한 사랑은 필연적으로 자신을 하나님과 이웃에게 주는 것을 포함한다. 주는 것에 실패하는 사람은 사랑할 수 없다!

웨슬리는 재산 때문에 사람의 우선순위와 우리의 관계가 변하는 것을 보았다. 우리는 비현실적인 독립심과 자기 의존감을 가지기 시작한다. 우리는 어떻게 주고 어떻게 받는지를 잊어버린다. 웨슬리는 진정한 종교가 결코 강한 자들부터 시작해서 약한 자들에게 가지 않고, 약한 사람들부터 강한 사람들에게 돌아간다고 믿었다. 그는 가난한 자들이 부자들보다 복음에 더 반응한다고 알게 되었다.

하나님을 특별히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하시는 분으로 이해하고, 스스로 가난한 사람들과 관계를 맺으면서 웨슬리의 나눔에 대한 원리들이 자리를 잡아갔다.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그의 관심은 포괄적이었다. 그렇다. 그는 그들에게 복음을 전파했으며, 그들에게 회심을 외쳤고, 그들을 속회에서 양육했다. 그는 또한 무료 진료소를 열었고, 학교, 봉제 협동조합, 그리고 가난한 자들을 위한 대부업체를 시작했다. 가난한 자들은 그의 친구이며 예수님의 특별한 친구였기에, 그리스도를 섬기는 수단으로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그들에게 베푸는 것에 웨슬리는 일평생 열정을 불태웠다.

웨슬리에 따르면, 부는 우리를 가난한 사람들로부터, 하나님으로부터, 그리고 나눔의 동기부여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경향이 있다. 가난한 자들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나누는 것은 즐거운 열정이며 그리스도의 사역에 기쁨으로 동참하는 것이다.

웨슬리 전통에서 나눔 (Giving in the Wesleyan Tradition)


나눔은 일반적인 휴머니즘에 호소할 때 생기는 반응 그 이상의 것이어야 한다. 그것은 신학적이고 그리고 선교적으로 뿌리를 내리고 자리를 잡아야 한다.

나눔은 하나님의 존재 자체에 뿌리를 둔다
나눔의 능력은 그 자체가 하나님의 선물이다. 모든 생명은 거룩한 삶과 돕는 선교를 함께 하자고 우리를 초대하시는 풍성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요, 아무 대가도 없이 거저 주신 선물이다. 우리는 청지기인데 청지기는 하나님의 식탁에 모든 사람이 앉을 자리를 마련하는 사람이다. 인자하신 하나님은 온 인류가족이 번성하는 데 필요한 모든 것을 가지고 있는지 확인하시려고 우리를 부르시고, 당신의 삶과 활동에 함께 하자고 우리를 초청하신다.

나눔은 그리스도의 제자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나눔은 성결한 삶의 일부이다. 속회가 가난한 자들을 위해 돈을 모으는 수단으로 시작되었지만, 사람들을 사랑으로 감싸고 성결한 삶을 책임지는 은혜의 공동체가 되었다. 제자의 성숙은 필연적으로 나눔의 증가를 포함한다.

나눔은 우리 노동의 열매보다 많은 것을 포함한다.
세상의 필요에 응답하는 절제된 생활은 나눔의 한 부분이다. 다른 사람들의 풍성한 삶에 필요한 것을 그들로부터 빼앗는 것을 거부함으로 우리는 나눌 수 있다. 웨슬리 전통의 나눔은 우리의 노동과 경영의 열매를 다른 사람들, 특히 가난한 사람들과 기쁘게 함께 나누는 것을 포함한다.

나눔은 가난한 자들과의 우정을 포함한다.
웨슬리는 매일 기도와 정기적인 성만찬을 행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가난한 자들을 정기적으로 심방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제자도와 영성 훈련에 빼놓을 수 없다고 했다. 그는 감리교인들에게 가난한 자에게 도움을 줄 때는 우편 등으로 보내는 대신에, 직접 전달하라고 충고했다. 가난한 자들을 교회 생활의 중심으로 영접하는 것을 제쳐 놓으면, 연합감리교나 다른 어떠한 교회에도 갱신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예수님이 그렇게 여기셨던 것처럼, 자원을 가진 우리들이 세상의 곤궁한 자들을 자기 가족의 일원들로 여기지 않으면 나눔은 전적으로 늘지 않을 것이다.

나눔은 개인적인 자선을 넘어 서로 관계를 맺고 공의와 연민으로 이루어진 평화 (shalom) 공동체를 세운다.
자선 그 자체는 온정을 이용한 지배가 될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은 공의이다. 웨슬리 자신도 가끔씩 가난한 자들에게 온정주의적인 태도를 보이긴 하지만, 가난한 자들의 곤경을 전체적으로 다루려 시도했다. 그는 그들에게 치료를 제공하는 것과 복음을 전파하는 것 사이에 차이를 두지 않았다. 사회봉사와 전도가 분리된 것이 아니었다. 두 가지 다 복된 소식이었다.

그는 노예무역, 알코올 밀매, 그리고 18세기 영국의 경제생활에서 가난한 자들과 다른 주요 기본식품에 징수하던 이자에 소리 높여 저항함으로써 자신의 청지기직을 표현하였다. 웨슬리 전통은 우리가 소리 없는 사람들에게 목소리가 되어 주고, 하나님의 공의, 관대함, 기쁨을 반영하는 공동체를 세우기 위해 우리의 통찰력과 영향력을 발휘하는 것을 포함한다.

결론


웨슬리에게 나눔이란 하나님의 관대하심을 감사하는데 바탕을 둔 우리의 관대함을 표현하는 수단이었으며,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라는 지상명령을 실천하는 수단이었다. 그는 감리교인들이 할 수 있는 만큼 많이 나눈다면, 모든 사람들이 충분히 가지게 되리라고 확신했다. 청지기직은 하나님의 모든 자녀들이 풍성한 식탁에 앉을 자리가 있는 풍성한 선물의 생활이다.

결론으로 적합한 웨슬리 자신의 말이 있다.

() 가장 고귀한 목적에 응답하신, 하나님의 뛰어난 선물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의 수중에 있는 돈은 배고픈 자들에게 먹을 것을, 목마른 자들에게 마실 것을, 헐벗은 자들에게 입을 것을 제공합니다. 나그네와 이방인에게 머리 곳을 줍니다. 그것으로 우리는 과부에게 남편의 자리를, 고아에게는 아비의 자리를 대신 채워줄 있습니다. 우리는 억눌린 자들을 보호할 있으며, 병든 자에게는 건강을 있고, 고통받는 자들에게는 안위를 있습니다. 그것은 눈먼 자에게 눈과 같으며, 다리 저는 자에게 다리와 같습니다. 실로 죽을 지경으로부터 끌어올리는 것입니다. "

(이 기사는 1997년에 열린 기부와 복음 심포지움과 2003년도 그리스도인의 청지기 의식에 관한 연합 감리교회 회의 때 Kenneth L. Carder 은퇴 감독이 발표한 연설문에서 발췌한 것이다. Carder감독은 내쉬빌과 미시시피 지역을 섬겼으며, 지금은 사우스 캐롤라이나 주 채플린시의 한 병원에서 치매환자의 기억을 도와주는 기억치료병동의 원목으로 섬기고 있다.)

올린날: 2016년 9월 23일, 연합감리교회 공보부, T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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