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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도구가 되게 하소서

 

마태복음 4:12-25

어떤 한인교회에 A권사님이 목사님과 심한 갈등을 겪고 있었습니다. 이야기도 해보고, 떼도 써보고, 화도 내 보았지만 목사님은 분명히 자신과 다른 의견을 갖고 계셨고, 권사님이 용납할 수 없는 방법으로 일을 처리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당신이 사랑하는 교회가 목사님의 잘못된 판단으로 엉뚱한 방향으로 가는 것은 안된다고 생각했습니다. 목사님은 그저 열심히 기도만 하고 있었는데 수요일 예배 때 손님으로 오신 목사님께서 <화해사역>에 대해 소개해주셨다고 합니다. 그 분은 그 교회가 어떤 위대한 일을 많이 한 들 하나가 되지 못하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없다는 요지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한인 이민교회들의 갈등의 전쟁터 속에서 아픔을 많이 보아오신 손님 목사님께서 안타깝게 말씀하시는 것을 듣고 A권사님 마음이 움직였습니다. 그 목사님이 떠나기 전에 조용히 만나서 그동안의 갈등과 속앓이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그 자리에서 자신이 곧 교회 웹사이트에 목사님의 잘못한 일에 대해 고발하려고 계획했음을 고백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제는 그것이 잘못되었음을 깨달았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다시 한번 목사님과 대화를 해보고, 목사님의 의중을 이해해보려고 노력하겠다고 약속하신 것입니다. 한편 그 목사님도 나중에 이메일을 통해 감사의 말씀을 전하면서, 자신의 고집스런 태도를 많이 돌아보게 되었다는 말씀도 하셨다고 합니다.

 예수님을 따른다고 하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그것은 어렵고 이해되지 않는 상황 속에서라도 자신을 <평화의 도구>로 드리는 것이 아닐까요? 성프란시스는 평화를 간구하는 기도를 드리면서, 믿는 자가 자신을 <평화의 도구>로 드릴 때 그곳에서 치유와 회복이 일어나고 하나님 나라가 생겨난다는 소망을 염원했습니다: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주소서.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상처가 있는 곳에 위로를,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

의혹이 있는 곳에 믿음을 심게 하소서.

예수님의 삶은 그렇게 <평화의 도구>로 자신을 내어놓으신 삶이었습니다. 사실 우리 주님은 어렸을 때부터 이 세상의 슬픔을 많이 보고 자라셨습니다. 당신이 어렸을 때에는 악한 헤롯왕 때문에 많은 어린아이들이 학살당한 사건을 겪으셨습니다. 그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주님의 가슴이 얼마나 아팠을까요?  그 뿐 아니라 로마의 억압 때문에 사람들이 정말 가난하고 비참하게 사는 모습을 보아야 했습니다. 또한 서른 살이 되었을 때에는 당신에게 세례를 준 사촌 형 세례요한이 또 다른 헤롯왕의 불의한 행동으로 인해 억울하게 감옥에 갇히는 사건까지 당하셨습니다 (마태4:12). 세례요한이 옥에 갇힌 후 당신의 어머니를 비롯한 많은 친척친지들은 모두 슬픔과 두려움에 잠겼을 것입니다. 억울함과 분노로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이러한 사건들로 인해 예수님도 역시 비록 하나님의 아들이셨지만 인간이셨기에 가슴 속에 분노와 아픔이 있으셨겠지요. 사악한 유대왕을 대항하여 군대를 일으키고 민중봉기를 일으키고 싶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민중봉기를 일으키지 않으셨습니다. 그 대신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셨고 (마태4:17), 자신을 <평화의 도구>로 내어놓으셨습니다. 세례요한이 감옥에 갇힌 후 예수님께서 처음 하신 일은 갈릴리, 즉, 가장 가난한 자들이 모여 사는 동네로 이사하신 것입니다. 병원도 없고 의사도 없는 그 곳에서 병든자들을 고치셨습니다. 몸의 질병뿐 아니라 마음과 정신의 병이 든 자들도 고쳐주셨습니다. 한번에 한 사람씩 하나님 나라의 치유와 회복을 만날 수 있도록 해주셨습니다 (마태4:23-25)

예수님께서 또 하신 것은 <하나님의 나라> 운동을 위해 제자공동체를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오늘 본문 마태4:18-22에 보니, 베드로와 안드레, 요한과 야고보 등 하나님나라를 위한 제자공동체를 만들기 시작하셨습니다. 누구든지 자신을 <하나님나라의 일꾼>으로 드리는 자들을 모은 것입니다. 제자들이 예수님께서 하신 <치유와 회복>의 장소에 도우미로 늘 함께 있었고, 나중에는 그 사역을 직접 하게 되었습니다.

 초대교회가 바리새인 사울 때문에 핍박을 받았을 때에 많은 성도들이 고난 속에서 도망 다녔습니다. “사울”이라고 하는 이름은 모두가 고개를 흔들 정도로 꺼리는 이름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사울이 주님을 만난 것입니다 (행9장). 그날부터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이 되기는 했는데, 제자공동체가 그를 용서하고 받아들이는 문제가 대두되었습니다. 사실 그 동안 동료 성도들이 고난 받은 것을 생각하면, 사울이 눈을 못 보게 된 기회를 이용하여 원수를 갚고 싶은 생각이 왜 없었겠습니까? 사울 때문에 어머님 아버님을 잃었거나, 아들 딸, 친지들을 잃어버린 사람들이라면 백번이라도 왜 그 생각을 하지 않았겠습니까?  제자 아나니아 역시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그가 기도 중에 주님을 뵈옵고, 주님이 사울을 찾아가라고 했을 때, 주님을 오히려 설득하려고 한 것은 너무나 당연한 심정인 것입니다: “주님, 잘 모르고 계십니까? 내가 들은 바로는 예루살렘에서 주님의 제자들에게 큰 해를 입혔다고 합니다. 바로 엊그제만해도 군대를 끌고 다메섹으로 쳐들어오고 있었지 않았습니까? 주님! 고정하시옵소서!” (개인 사역 - 행9:13-14).

 그러나 주님은 사울을 향하여 당신이 택한 그릇이라고 말씀하셨고, 이방인과 왕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을 위해 고난을 받을 것이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행9:15-16). 그러한 주님의 말씀 앞에 아나니아는 더 이상 거역하지 못했습니다. 주님은 늘 그런 분이셨으니까요. 바로 3일전까지만 해도 군대를 이끌고 자기와 다메섹 제자들을 잔멸하겠다고 달려들었던 사람이었는데 그를 받아들이려고 가는 아나니아의 발걸음은 어떠했겠습니까? 그의 심정은 마치 아들 이삭을 바치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모리아산으로 터벅터벅 걸어갔던 아브라함의 심정과 같지 않았을까요?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며 걸었던 3일길이었습니다.  그렇게 가서 “여호와 이레”의 하나님을 만났던 아브라함처럼 아나니아 역시 사울을 만났을 때 이미 주님의 명령아래 변해버린 한 사람을 만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사울을 향해 “형제 사울아” 부르며 세례를 베풀고 성령 충만함에 이르도록 기도해주었습니다 (행9:17-18). 예수님의 제자 아나니아는 자기의 원수형제로 받아들였습니다. 자신을 평화의 도구로 주님께 드린 것입니다.

 이러한 제자들의 행렬은 끊이지 않고 계속 되었습니다. 아나니아를 시작으로 바나바가 사울을 예루살렘 제자 공동체에 소개했고 (행9:27), 그들은 놀랍게도 예루살렘 거리를 원수였던 사울과 함께 “출입”하기까지 했습니다 (행9:28). 이 제자들의 놀라운 원수사랑은 예루살렘 유대인들을 감동시켰습니다. 그들이 함께 함을 보고 사람들은 모여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리하여 온 유대와 갈릴리와 사마리아 교회가 평안하여 든든히 서 가고 주를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로 진행하여 수가 더 많아지니라” (행9:31). 이러한 행렬은 나중에 초대교회가 둘로 갈라지기 일보 직전에 하나가 될 수 있게 되는 역사에까지 이어지게 됩니다 (행15장)

 아나니아, 바나바, 베드로, 야고보 등 예수님의 제자들이 사울을 받아들였을 때에 그들은 <평화의 도구>고 자신들을 내어드렸습니다. 한번에 한 사람씩 자신을 평화의 도구로 내어드리는 곳에 “성령님의 도우심” (행9:31)이 충만하여, 치유와 회복이 일어났고, 교회는 하나가 되어 계속 발전하였습니다. 오늘도 이 행렬은 계속 되고 있고, 계속 되어야만 합니다.

 설교 앞부분에서 말씀 드렸던 이야기 속에서 손님 목사님께서 화해의 진리를 선포하셨을 때에 <평화의 도구>가 되셨습니다. A권사님이 그 말씀에 응답하여 교회웹사이트에 목사님을 비방하는 글을 싣지 않기로 작정하셨을 때에 <평화의 도구>가 되셨습니다. 그러한 권사님의 화해의 손길을 받으시고, 한 마음으로 계속 대화를 하시겠다고 결심하신 목사님도 마찬가지로 <평화의 도구>가 되셨습니다.

성 프란시스코의 기도는 다음과 같이 계속 이어집니다:

오 주여! 나로 하여금 당신의 평화의 도구가 되게 하소서.

위로받기 보다는 위로하기를 더 여망케 하시고,

이해하며 사랑받기 보다는 이해하고 사랑하기를

더 구하는 사람이 되게 하여주소서.

이는 줌으로써 받으며, 용서함으로써 용서받으며,

죽음으로써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기 때문이나이다.

우리 모두 예수님의 제자들로서 평화의 나라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나 자신을 <평화의 도구>로 내어드리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아멘.

묵상과 토론을 위한 질문들

  1. 주위에서 <평화의 도구>로 자신을 드린 이웃들의 작은 이야기들이 생각나면 함께 나누시기 바랍니다
  2. 각자가 자신을 <평화의 도구>로 드리려고 할 때에 방해(장애)가 되는 것들은 무엇입니까?
  3. 각자가 자신을 <평화의 도구>로 드리려고 할 때에 동기부여가 되는 것들은 무엇입니까?

글쓴이: 홍혜성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