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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보다(Find God in Jesus) - 요 14:5-11

 

나는 하나님을 믿습니다

1.

'사도신경'의 고백을 따라 우리가 믿는 것이 무엇인지를 확인하는 여정을 시작하면서, 저는 첫 번째 고백을 건너 뛰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고백으로 시작했습니다. 우리가 믿는 신앙은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시작되었기 때문입니다. '기독교'라는 이름에 사용된 한자 '基督'은 '그리스도'에 대한 한자어입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믿음입니다. 따라서 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지 그리고 그분에 대해 무엇을 믿는 것인지를 먼저 확인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 동안 예수 그리스도에 관해 우리가 믿는 것들을 모두 살펴 보았으니, 이제 첫 번째 고백으로 돌아가야 할 때입니다.

첫 번째 고백이 라틴어 원문으로는 이렇게 시작합니다.

Credo in Deum.
나는 신을 믿습니다.

"나는 하나님을 믿습니다"라고 하지 않고 "나는 신을 믿습니다"라고 번역하니까 전혀 다른 느낌이 들 것입니다. 누군가를 만나 "당신은 하나님을 믿습니까?"라고 물으면 기독교인들만이 "예"라고 답할 것입니다. 반면, "당신은 신을 믿습니까?"라고 물으면 기독교인이 아닌 사람들 중에도 많은 이들이 "예"라고 답할 것입니다.

신에 대한 믿음은 모든 인간에게서 나타나는 보편적인 현상입니다. 어느 문화, 어느 인종, 어느 시대에 가든, 신에 대한 갈망과 믿음은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인류학자들과 심리학자들은 그 이유를 여러 가지로 설명합니다. 그 중 가장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얻은 설명은 인간의 한계성에서 생기는 두려움을 해결하려는 수단으로 종교가 만들어졌다는 설명입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인간의 종교성은 충분히 설명되지 않습니다. 필요에 의해서 만들어졌다기보다는 인간의 본성 깊은 곳에 신을 찾을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다고 보는 것이 옳습니다.

남녀간의 사랑이 좋은 비유가 될 것입니다. 남녀간의 사랑을 '잃어버린 반쪽에 대한 갈망'으로 보는 해석이 있습니다. 인간이 모태 안에 있는 동안에는 양성일체 즉 남성과 여성이 합쳐진 상태에 있습니다. 그것이 인간의 원초적인 상태이며, 이 상태에 있을 때 인간은 가장 행복하다고 합니다.

둥그런 핏덩이와 같던 태아는 시간이 흐르면서 사람의 형체를 가지게 되고, 남성 혹은 여성의 성기가 주어집니다. 신체적인 조건도 주어진 성에 맞추어 형성됩니다. 아이가 태어나면 부모는 아이의 성별을 확인하고 기뻐하지만, 그 아이의 내면은 여전히 양성을 다 가진 상태에 있습니다. 아이는 자라가면서 서서히 자신의 성에 눈을 뜨고, 자기에게 없는 다른 성을 부정하기 시작합니다. 어린 아이들이 가끔 다른 성에 대해 공격적인 태도를 보이는데, 그것은 자신의 성 정체성을 확고히 하려는 무의식적인 노력입니다.

이런 까닭에 모든 인간의 내면에는 자신이 거부한 다른 성에 대한 깊은 갈망이 남아 있다고 합니다. 태중에서 처음 형성되었을 때의 그 원초적인 행복을 그리워하는 것입니다. 그 행복을 다시 맛보기 위해 인간은 다른 성을 찾습니다. 다른 성과 사랑을 나눔으로써 잃어버린 반쪽을 찾고 원초적인 온전함의 행복을 맛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다른 성을 갈망하고 사랑하고 결혼하는 것은 필요에 의한 것이 아니라, 인간 존재의 본성 깊은 곳에 그것에 대한 갈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에 대한 인간의 갈망은 인간의 원초적인 상태가 어떤 것이었는지를 짐작하게 합니다.

모든 인간의 마음 안에 다른 성에 대한 갈망이 있는 것처럼, 모든 인간의 마음 안에는 신을 향한 갈망이 있습니다. 신에 대한 믿음은 인간의 한계성을 보완하기 위한 필요 때문에 생긴 것이 아니라, 인간 존재의 본질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인간이 어머니의 모태에서 두 성이 하나가 되어 살았던 그 원초적인 행복을 그리워하여 다른 성의 사랑을 갈망하듯, 인간은 태초에 신과 하나가 되어 살았던 그 원초적인 행복을 그리워하는 것입니다. 모든 인류에게 보편적인 이 종교성은 인간이 원래 신과 일치되어 살았다는 진실, 그런데 인간이 신에게 등지고 떨어져 나왔다는 비극, 그리고 인간은 다시 신에게로 돌아가 하나가 될 때에 가장 행복할 수 있다는 진실을 말해 줍니다.

2.

문제는 신이라고 다 같은 신이 아니라는 사실에 있습니다. 신이라 불려지는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신이라 불리는 것이 모두 태초에 우리와 하나였던 그 신은 아닐 것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이 '만신전'(pantheon)같은 세상에서 어떻게 하면 우리가 돌아가야 할 참된 신을 찾을 수 있을까요?

신을 신으로 부르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초월성'(transcendence) 때문입니다. 신은 인간보다 더 많이 알아야 하고, 더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무당이나 점쟁이 혹은 영매(spiritual medium)는 그런 능력 있는 신을 부린다고 주장합니다. 그들 중 신 내림을 받았다는 사람들을 통해 일어나는 일들을 보면 때로 소름이 끼칠 정도로 놀랍습니다. 그들이 섬기는 신은 초월적인 능력을 가지고 있음에 분명합니다. 성경은 이런 신을 '귀신'(demons)이라고 부릅니다.

귀신을 섬기는 혹은 부리는 사람들이 모두 가짜라고 치부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아주 위험한 생각입니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가 그들을 통해서 일어나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을 보게 되면 두 손 두 발 다 들고 그 신에게 항복합니다. 영적 세계를 완전하게 해명할 수는 없지만, 신 내림을 받은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현상은 초월적인 영적 존재가 있음을 암시합니다. 다만, 그 신의 정체가 무엇인지를 꿰뚫어 보아야 합니다.

그들이 섬기는 신은 몇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첫째, 인간을 노예로 만듭니다. 신 내림을 받은 사람은 아무리 그 신으로부터 벗어나려 해도 놓아주지 않습니다. 그렇게 되면 소위 '신병'(sickness caused by spirit-possession)이라는 것을 앓습니다. 그 신은 인간을 자유케 하고 치유하고 회복시켜 온전한 인간으로 만드는 데 관심이 없습니다. 자신의 노예로 만들려 합니다.

둘째, 그 신에게는 진리도, 정의도, 윤리도, 질서도 없습니다. 아무리 부도덕하게 사는 사람이라도 복채만 두둑이 주면 신의 도움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귀신을 부린다는 사람들이 고매한 인격과 영성으로 성숙하는 것을 본 적이 없습니다. 그 신에게는 초월적인 힘이 분명히 존재하지만, 진리와 정의와 사랑 같은 덕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흥미롭게도, 사람들은 이런 신을 더 좋아합니다. 그래서 미신과 점집이 인기를 끄는 것입니다. 자신의 삶에 대해 이래라 저래라 간섭하지 않고 언제나 자신의 편이 되어 주는 신을 원합니다. 평상시에는 아무 간섭을 하지 말기를 바랍니다. 오직 문제가 생길 때에만 개입하여 해결해 주기를 기대합니다. 자신이 아무리 악하게 살더라도 오직 자신의 편을 들어 주기 바랍니다. 조금만 생각해 보면, 그 신은 인간의 도덕성조차도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을 알 수 있고, 그런 신이라면 인간이 엎드려 경배할 대상이 아님을 알 수 있는데도, 당장의 필요를 위해 그 앞에 머리를 조아립니다.

여기서 우리는, 인간이 진실로 섬길만한 신은 '초월성'과 함께 '진리성'(truthfulness)을 함께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확인합니다. 옳고 그른 것을 따지고 불의와 정의를 구별하며 죄와 의를 분별하는 초월자만이 우리의 예배의 대상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잘못 할 때 책망하고 때로는 회초리를 드는 신이어야 섬길 가치가 있습니다. 인간이 '부릴 수 있는' 신은 인간의 경배의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섬길만한 신은 초월적인 능력 때문만이 아니라 그 진리와 정의와 거룩함으로 인해 우리를 엎드리게 만드는 신이어야 합니다.

3.

그렇다면, 그런 신을 어떻게 찾을 수 있을까요? 태초에 우리 존재의 근거였던 그 참된 신, 그리고 그 신과 다시 하나가 될 때에만 참된 안식과 회복을 얻게 되는 그 참된 신, 그 신을 어떻게 찾을 수 있을까요? 종교가 이렇게 많고, 종교마다 자신의 신이 참된 신이라고 주장하는 상황에서 무엇을 기준으로 어떻게 선택해야 할까요?

어떤 사람들은 모든 종교가 결국 다 같은 신을 믿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 종교들을 섭렵하고 그 종교들의 주장 가운데서 좋은 것만을 골라 믿는 것이 가장 안전하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종교인은 아니지만 영적인 사람이다"(I am not religious but spiritual)라고 말하는 현대인들이 이렇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런 경향에 맞추어 뉴에이지 같은 신흥 종교가 번성하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두 가지의 큰 문제가 있습니다.

첫째, "종교는 다 같다"는 말은 거짓입니다. 종교들을 엄밀히 분석해 보면, 신에 대한 이해가 종교마다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종교들이 찾으려는 궁극적인 대상은 같은 것일지 몰라도, 종교마다 신에 대해 믿는 것이 다릅니다. 종교들이 신에 대해 가르치는 내용들을 통합시켜 놓으면 진짜 신에 가장 가까운 결과를 얻는 것이 아닙니다. 신도 아니고 인간도 아닌 괴물이 만들어집니다.

둘째, "좋은 것만 골라 믿는다"는 말 속에 함정이 있습니다. 여러 종교들을 섭렵하여 좋은 것만 골라 놓았다면, 그것은 내가 만든 종교이며, 내가 만든 신입니다. 그런 종교, 그런 신은 나의 장난감에 불과합니다.

그러므로 가장 안전한 길은 참된 신에게 가장 잘 인도할 수 있는 종교를 찾는 것입니다. "나는 종교인은 아니지만 영적인 사람이다"라는 말은 포스트모더니즘(post-modernism)의 거대한 속임수입니다. 진실은 그 반대여야 합니다. "나는 영적인 사람이므로 종교인이 되었다"라고 말해야 옳습니다. 참된 종교는 참된 신을 발견하도록 돕는 통로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종교가 참된 신을 발견하도록 돕는 종교입니까? 저는 이 맥락에서 이웃 종교에 대해 말하고 싶지 않습니다. 다만, 제가 저의 종교를 통해 참된 신을 만났다는 사실만을 증언하려 합니다.

저는 기독교인 어머니에게 태어났기에 저절로 기독교인이 되었습니다. 만일 불교 가정에 태어났더라면 제가 지금과는 다른 상태에 있을지 모릅니다. 기독교인 어머니에게 태어나기는 했지만, 어쩔 수 없이 기독교인이 된 것은 아닙니다. 중학교 2학년 때 제 자신의 의지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영접했습니다. 그 이후로 저 나름대로는 진지하게 믿음 생활을 했고 믿음 안에서 자라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대학을 마친 후, 중학교 2학년 때 받은 소명감에 응답하기 위해 신학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신학 공부를 하는 내내 저의 관심사는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그래서 신약성서 중에서도 복음서, 복음서 연구 중에서도 예수에 대한 역사적 연구(Historical Study of Jesus)를 전공으로 선택하여 연구했고, 박사학위를 받았습니다. 그 이후, 신학교에서 그리고 교회에서 가르치고 설교하며 계속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붙들고 씨름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제 목사가 되었으니 믿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습니다. 제가 믿는 것에 대해 늘 질문하고, 제가 믿어야 할 것들을 붙들고 씨름해 왔습니다. 만일 지금이라도 이 믿음이 제게 가짜로 드러난다면 목사직도 버리고 기독교 신앙도 떠나겠다는 태도로 살고 있습니다. 저는 믿기에 설교하는 것이지, 설교하기 위해서 믿지 않습니다.

4.

그렇게 얻은 결론은 "예수가 길이다"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참된 신을 만나는 길입니다. 그분을 통해 계시된 신에 대해 알면 알수록, 그분이 우리가 떨어져 나온 그 신이라는 것, 그리고 우리가 다시 연합해야 할 그 신이라는 것을 더 분명히 알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도마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거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로 갈 사람이 없다. 너희가 나를 알았더라면 내 아버지도 알았을 것이다. 이제 너희는 내 아버지를 알고 있으며, 그분을 이미 보았다. (요 14:6-7)

이 말씀을 하실 때 제자들은 그 말씀의 의미를 다 알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빌립이 묻습니다. "주님, 우리에게 아버지를 보여 주십시오. 그러면 좋겠습니다." (8절)

그러자 주님께서 대답하십니다.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랫동안 너희와 함께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사람은 아버지를 보았다. 그런데 네가 어찌하여 "우리에게 아버지를 보여 주십시오"하고 말하느냐?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는 것을, 네가 믿지 않느냐? (9-10절)

예수께서 하시는 말씀과 행동을 꿰뚫어 본 사람이라면 그분에게서 뭔가 특별한 것을 보았어야 합니다. 그것이 무엇인지를 붙들고 씨름하다 보면 하나님을 보았을 터인데, 제자들은 아직 그러지 못했습니다. 주님께서는 그 점을 답답해 하십니다. 그래서 이렇게 덧붙이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하는 말은 내 마음대로 하는 것이 아니다.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면서 자기의 일을 하신다.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는 것을 믿어라. 믿지 못하겠거든 내가 하는 그 일들을 보아서라도 믿어라. (10-11절)

지난 사순절 새벽 기도회를 통해 저는 마태복음 5장부터 7장에 나오는 '산상설교'를 자세하게 그리고 깊이 묵상하면서 이 사실을 확인했습니다. 빌립에게 "내가 너희에게 하는 말은 내 마음대로 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씀하셨는데, 말씀 속에서 반짝이는 진리를 빛을 볼 때마다 진실로 그렇다는 고백을 했습니다. 말씀을 묵상하는 과정에서 저는 "아, 도대체 이런 진리가 어떻게 사람에게서 나올 수 있을까?"라고 감탄을 했습니다. 그것은 어디서 배운 것도 아닐 터이고, 연구해서 얻은 결론도 아닐 것이며, 수도 정진해서 깨친 것도 아닐 터였습니다. 진리의 본체이신 신에게서 흘러 나온 것이 아니고는 이럴 수가 없다 싶었습니다.

저는 예수가 참된 신에게 이르는 길이라는 사실을 알고서 교회에 발을 들여 놓은 것은 아닙니다. 먼저 기독교 가정에 태어났고, 예수에 대해 배웠으며, 마침내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영접했습니다. 제 앞에 난 길을 걷다 보니 그 길이 생명의 길이었던 것입니다. 어릴 때부터 내 손에 무엇인가 쥐어져 있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것이 엄청난 보물이었던 것입니다.

5.

이 지점에서 '신'이라는 말을 '하나님'이라는 말로 바꾸겠습니다. 존 로스(John Ross) 선교사가 1882년에 성서를 우리말로 번역하면서 이 단어를 사용한 이후로 '하나님'은 개신교회의 전용어가 되었습니다. 개신교보다 백 년 정도 일찍 한국 땅을 밟은 가톨릭교회는 '천주님'이라는 용어를 사용했습니다. '천주교회'라는 이름이 거기서 왔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하나님'이라는 단어가 기독교의 신에 대한 고유명사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이런 까닭에 '사도신경'의 첫 고백은 이렇게 번역해야 옳습니다.

나는 하나님을 믿습니다.

"나는 신을 믿습니다"라고 고백할 때는 어떤 신이든 좋습니다. 무당도 이렇게 고백할 수 있고, 새벽에 정한수 떠놓고 자식의 성공을 비는 여인도 이렇게 고백할 수 있으며, 기 수련을 하는 사람들도 '에너지 신'을 믿는다고 고백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나는 하나님을 믿습니다"라고 고백하면 의미가 전혀 달라집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계시된 그 하나님을 믿는다는 뜻입니다. "나는 하나님을 믿습니다"라는 고백은 따라서 "나는 아무 신이나 믿지 않습니다"라는 뜻입니다.

심각한 질병에 걸렸을 때, 우리는 가장 믿을만한 의사를 찾기 위해서 백방으로 노력합니다. 감기 정도야 아무 의사든 상관 없지만, 생사를 결정하는 중요한 치료의 경우에는 가장 실력 있고 믿을만한 의사를 찾아야 합니다. 의사도 그렇다면, 우리의 인생 전체를 결정짓고 또한 영원한 운명을 결정지을 신을 찾는 것은 얼마나 더 심각한 일입니까? 그렇기 때문에 "나는 아무 신이나 믿지 않습니다"라는 고백이 우리에게 있어야 합니다. "나는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계시된 하나님을 믿습니다"라고 고백해야 합니다.

이 대목에서 '믿는다'는 말에 대해서도 잠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믿음'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아만'(aman)은 '신뢰' 혹은 '의지'를 의미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말은 하나님의 존재를 믿는다는 뜻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분에게 의지하고 살아가는 것을 가리킵니다. 야고보 사도가 믿음에 대해 말하면서 이렇게 썼습니다.

그대는 하나님께서 한 분이심을 믿고 있습니다. 잘하는 일입니다. 그런데 귀신들도 그렇게 믿고 떱니다. (약 2:19)

신이 존재한다는 사실 그리고 참된 신은 하나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고 믿는 것으로는 부족하다는 뜻입니다. 귀신들도 그만큼은 한다는 뜻입니다. 믿는다는 것은 그 신이 어떤 분인지를 알고 그 신에게 돌아가 그 신과 연합하여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믿음이 참되다면 행실로 믿음의 증거가 보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야고보 사도가 "영혼이 없는 몸이 죽은 것과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입니다"(2:26)라고 말한 것입니다.

미국인들을 대상으로 한 설문 조사에 의하면, 아직도 90%가 넘는 사람들이 신을 믿는다고 대답합니다. 하지만 실제로 일상 생활에서 그 신을 의지하고 신의 뜻을 찾고 순종하기 위해 힘쓰는 사람들은 많지 않습니다. 만일 신이 정말 존재한다고 믿는다면, 그 신이 진짜 신이라면, 그 믿음은 그 사람의 삶에 중대한 변화를 만들어 내야만 합니다. 그러니 엄밀하게 말하자면 신을 믿는다고 대답한 사람들의 절대 다수가 믿지 않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사람들을 가리켜 '실천적 무신론자'(practical atheist)라고 부릅니다. 마음으로는 하나님을 믿는 것 같지만, 말하고 행동하는 것을 보면 무신론자나 다름이 없다는 뜻입니다. '아는 믿음'으로 그치고 '행하는 믿음'에 이르지 못한 것을 말합니다. 그것은 엄밀하게 말해서 믿는 것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한껏 후하게 평가한다면, '더 자라야 할 믿음'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6.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하나님을 믿으십니까? 저는 지금 '신'을 믿느냐고 여쭙지 않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계시된 그 하나님'을 믿는지 여쭈었습니다. 저는 또한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는지를 여쭌 것이 아닙니다. 매일 그 하나님을 실제로 의지하고 그 뜻을 찾으며 순종하고 있는지를 여쭈었습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내면에 있는 거대한 구멍을 외면한 채 하나님 없이 살기를 선택하는지 모릅니다. 무신론자에도 종류가 많습니다. 무지해서 하나님 없이 사는 '불쌍한 무신론자'도 있고, 자기 욕심대로 살고 싶어서 택한 '부도덕한 무신론자'도 있으며, 신을 믿는 것이 귀찮아서 안 믿는 '게으른 무신론자'도 있고, 자신이 알고 믿는 것이 전부라고 착각하는 '교만한 무신론자'도 있습니다. 그 동기가 무엇이든, 이들은 참으로 불행한 선택을 한 것입니다.

앞에서 말했듯이, 우리는 유아기에 잃어버린 우리의 다른 성을 되찾고 싶어서 사랑을 추구합니다. 나와 다른 성과 연합하여 진정한 사랑을 나눌 때, 인간은 존재 깊은 곳까지 미치는 기쁨과 행복을 경험합니다. 인간이면 누구나 그 사랑, 그 하나됨, 그 행복감을 갈구하게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 없이 사는 사람도 많습니다. 그 사랑이 채워진다면 더 없이 좋겠지만, 그것 없이도 인생은 얼마든지 보람 있고 또한 행복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태초에 우리와 하나였던 하나님을 영영 잊고 살아가는 것은 피해야만 하는 불행한 선택입니다. 다른 성을 통해 얻는 사랑 없이는 살 수 있지만, 하나님을 찾고 그 하나님과 다시 하나가 되지 않고는 우리 인생은 그 무엇으로도 만족될 수 없습니다. 다른 것이 다 채워져도 하나님이 없이는 여전히 우리 존재의 가장 깊은 곳에 크고도 깊은 구멍이 그대로 남아 있게 됩니다. 독신 서약을 하고 평생을 하나님께 바친 사람들이 그 누구보다도 행복한 이유는 다른 성에게서 얻는 행복과는 비교할 수 없는 행복을 하나님을 통해 얻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믿기에 이 자리에 오신 여러분, 그리고 하나님을 믿어 보려고 이 자리에 오신 여러분, 잘 하셨습니다. 여러분은 여러 경로를 통해 여기까지 오셨습니다. 저처럼 기독교 가정에 태어나 순탄하게 기독교인으로 자란 분도 계십니다. 무신론자로 살다가 어떤 계기를 만나 기독교인이 되신 분도 계십니다. 또 다른 종교를 믿다가 개종하신 분도 계십니다. 어떤 경로로 여기까지 오셨든, 저는 무수한 증인들과 함께 증언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바른 길에 들어섰습니다. 잘 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길입니다. 참된 하나님을 찾고 그 하나님을 만나고 그 하나님과 연합하여 태초의 상태를 회복하는 길입니다.

그러므로 이 길에서 흔들리지 말기 바랍니다. 다른 길이 있다 해서 두리번거리지 마시기 바랍니다. 때로 우리가 걷는 길이 좁고 험하다고 하여 낙심하거나 포기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모시고 그분을 더 뜨겁게 사랑하십시다. 그분을 아는 것만큼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그분에게 든든히 연결된 만큼 하나님에게 연결되는 것입니다.

이성에게서 진정한 사랑을 얻은 사람은 그 사랑의 힘으로 모든 어려움을 이겨낼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참된 하나님을 만나 우리 내면에 있는 거대한 공간이 채워지면, 다른 것들은 별로 상관이 없어집니다. 주님께서 우리 내면에 채워주신 그 사랑과 은혜와 평화와 기쁨으로 모든 어려움을 이겨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분에게서 흘러 넘치는 진리와 정의와 거룩함을 따라 우리도 그렇게 생각하고 살아가게 됩니다.

그것이 "나는 하나님을 믿습니다"라고 고백하는 사람의 삶의 비밀입니다. 이 신비한 비밀과 은총이 저와 여러분에게 함께 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주 예수님,
주님을 믿습니다.
저희에게
더욱 주님을 깊이 알게 하시고
더욱 참되게 믿게 하소서.
믿음의 증거가
저희의 삶 속에 드러나게 하소서.
입술의 고백이 아니라
삶으로 고백하게 하소서.
아멘.

글쓴이: 김영봉 목사, 와싱톤한인교회 VA
올린날: 2013년 4월 8일 연합감리교회 공보부 T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