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맏아들도 사람입니다!

 

한국의 지하철 역에 가보면 분실물 센터 (Lost & Found)라는 곳이 있습니다.
매일 수많은 셀 폰, 지갑, 핸드백, 아주 다양한 물건들이 주인을 기다립니다.
분실물 센터 옆을 지날 때 마다 드는 생각이 있습니다.

‘현대인은 모두 ‘헛 똑똑이’,  정말 소중한 것들을 잃어 버린 채 살고 있다.’
셀 폰 속에 담겨 있는 사랑하는 사람의 목소리, 살가운 짧은 동영상. 전화기만 잃어버린 게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도 잊고 삽니다. 지갑과 돈만 잃어 버린 게 아니지요. 왜 돈을 버는지, 돈벌이에 대한 목적도 함께 잊어 버렸습니다. 어떻게 돈을 폼나게, 정말 멋있게 쓰는지 씀씀이 방법도 잃어 버렸습니다.

사실 누가복음 15장 전체가 ‘분실물 센터’ 입니다. 잃어버린 양, 잃어버린 동전, 잃어버린 아들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양을 잃어버린 목자, 동전을 잃어버린 여인, 집나간 아들을 기다리는 아버지. 서로 다른 비유가 아니라, 한없는 하나님의 사랑을 빗댄 하나의 비유이지요. 

자, ‘탕자의 비유’로 알려진 본문 말씀 속으로 함께 들어가 봅시다.
우선 비유의 제목을 먼저 복수로 바꿔야 될 것 같습니다. 탕자들의 비유 내지는 집나간 두 아들들의 이야기, 뭐 이렇게 바꿔야 됩니다. 탕자의 이야기는 늘 집 나간 ‘막가파’ 둘째 아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해 주시는 아버지의 ‘묻지마’ 사랑 이야기로만 묘사돼 왔습니다. 저는 오늘 동생의 철없는 방랑벽과 상관없이 찰떡같이 집에 붙어 있었던, 맏아들의 시각에서 탕자의 비유를 함께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혹시 집에서 장남이나 장녀이신 분들 한번 손들어 보시기 바랍니다.우리 맏아들, 맏딸들, 등을 감싸주면서 격려해 주십시다.
“그동안 정말 수고 많이 하셨습니다!”
제 아버지는 가난한 시골에서 풍운의 꿈을 안고, 서울에 올라와서, 등이 휘도록 일해서 간신히 방 두칸짜리 조그만 전세집 하나 마련했습니다. 신혼의 단 꿈을 맛볼 겨를도 없이, 다섯 명 동생들을 한 집에 데리고 살면서, 모두 다 시집/장가 보냈습니다. 어렸을 적 생각 해보면, 늘 고모/ 삼촌들과 북적대며 함께 살았습니다. 아버지가 왜 이런 고생을 사서 해야 됩니까? 맏아들로 태어났기 때문이지요. 또 저희 어머니는 50년 넘게 시어머니를 모시고 사셨습니다. 왜요? 이유는 간단합니다.    맏며느리이기 때문입니다. 맏아들, 맏딸, 맏며느리도 다 사람입니다.  어찌 불평/원망이 없겠습니까?

본문은 입술 실룩거리면서 불만으로 가득 차 있는 맏아들의 이야기입니다. 맏아들의 곱지않은 눈빛으로 집나간 둘째 아들 이야기를 읽어 봅시다. 한 핏줄, 한 배에서 태어났는데 도저히 자기 동생을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아버지가 시퍼렇게 살아계신데, 먼저 유산 떼달라고 아우성 입니다. 설령 아버지가 생전에 재산을 미리 나눠줬다손 치더라도, 돌아가시기 전까지 전재산이 아버지께 속해 있는게 당시 재산관리법 입니다. 그런데 둘째 아들은 재산을 받자마자, 그 날로 먼 곳으로 훌쩍 떠나버립니다.

둘째 아들이 우연히 재산을 요구한 게 아니지요. 아주 치밀한 계획 속에 재산을 받았고, 아버지와 형이 없는 먼 곳에 가서 떵떵거리며 살기로 아예 작심한 겁니다. 집 안에서 새는 바가지, 집 밖에서도 새기 마련입니다. 둘째 아들은 금새 쪽박을 찹니다. 구멍 뚫린 쪽박 신세가 됩니다. 탕자라는 말 자체에 이런 이미지가 숨겨져 있습니다. 펑펑 써버리는 놈, 소중한 것들을 물 쏟아 버리듯 질질 흘리고 다니는 녀석. 그 많던 술친구는 온데간데 없고, 아리따운 여인들도 찾을 길이 없습니다. 이제 찢어지게 가난한 집 더부살이 하며, 쥐엄열매나 바라보는 처량한 신세. 자고 일어났더니 유명해졌다는 말도 있지만, 이 탕자는 하루 밤 지나고 났더니 알거지가 된 거죠. 모든 게 다 일장춘몽이고, 하루 사이에 천당과 지옥을 왔다 갔다 합니다.

잊지 마세요. 지금 우리는 큰아들의 시각에서 탕자의 비유를 읽고 있습니다. 책임감 강한 큰아들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재기해 보려고 몸부림 칠 겁니다. 무슨 낯짝을 가지고 다시 집에 돌아올 생각을 하겠습니까? 동생의 독백 대사를 들어볼까요? 정말 울화가 치밀어 오릅니다. “내 아버지의 품꾼들에게는 양식이 풍족하여 먹고도 남는데 나는 여기서 굶어 죽는구나. 아버지께 돌아가 말해야겠다. 저를 아버지의 품꾼 가운데 하나로 여기십시오.” 재산 홀딱 날려먹고 맘 약한 아버지께 다시 비비려 들다니… 괘씸해요. 진짜 품꾼이 되겠다는 건지, 아니면 또 시늉만 하는 건지, 동생의 회개를 도대체 믿을 수가, 아니 용납할 수 조차 없습니다.              

아버지는 이런 큰 아들의 들끓는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멀리서 터벅터벅 걸어오는 둘째 아들을 한 눈에 알아보고 버선 발로 뛰어나가서, 끌어 안고 뽀뽀하고 난리법석을 떱니다.어디 그뿐입니까? 종놈 되겠다고 눈물 연기하는 동생에게 가장 좋은 옷을 입혀 줍니다. 손가락에는 반지를 끼우고, 신발을 신겨 줍니다.   무슨 뜻입니까? 종은 커녕 아들로서의 위치를 모든 품군들 앞에서 단번에 확인해 줍니다. 자, 살진 송아지를 잡고, 잔치가 시작됩니다.

우리가 함께 먹고 즐기자. 내 아들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잃어버렸다가 다시 찾았다.”

아버지 입장에서 보면 아들을 다시 지하철 분실물 센터에서 되찾은 거죠. 그런데 형 입장은 어떨까요? 평생 다시는 안 보고 싶었던 동생이 떡 눈 앞에 나타났습니다. 그것도 종놈이 아니라, 다시 아버지의 사랑하는 아들로 말입니다. 이미 가져간 재산말고, 이제는 큰 아들 몫에서 다시 재산을 나눠줘야 됩니다. 처음 재산을 나눌 때는 어차피 아버지 것이니까 괘씸해도 별 상관이 없었죠. 이번에 상황이 완전히 다릅니다. 내 몫을 버러지 같은 탕자와 나눠야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맏아들도 사람입니다!     28절 좀 보세요. 그동안 억눌러 왔던 불편함/ 억울함이 한번에 폭발합니다. 큰 아들의 콧구멍은 벌름벌름, 머리에선 뜨거운 김이 모락모락 나옵니다. 울화가 치밀어 아예 집에 들어 오지도 않습니다. 아버지가 나와서 큰 아들을 달래자, 아버지에게 화를 쏟아 붓습니다.

보십시오. 저는 수년 동안, 아버지를 섬겨왔습니다.”

원어로 보면 더 재미있습니다. 종이 주인을 목숨 다해 받들듯이 ‘섬겼다’는 말입니다. “[저는] 한번도 아버지의 명을 어기지 않았습니다. 아버지께서는 한번도   저를 위해서 친구들과 즐기라고 염소 새끼 한 마리도 주신 일이 없습니다. 그런데 창녀들과 함께 아버지의 재산을 다 써버린 아들이 집에 돌아오니까 아버지께서는 그를 위해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먹는 게 큰 문제입니다. 특별히 먹는 것 가지고 차별 당하면, 정말 화납니다. 맏아들도 사람인데 화 내는 게 당연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사랑, 뭐 이런 성경말씀 딱 덮어버리고, 여러분이 이 맏아들이라면 화 나지 않겠습니까? 정당한 분노를 느끼십니까? 자 지금부터가 오늘 말씀의 핵심입니다.

맏아들은 동생 탕자를 향해 분노를 느낄 어떤 정당한 이유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동생, 형 모두 사랑하는 아버지의 품을 떠났기 때문입니다. 둘 다 똑 같은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말씀 드리면 당장 말도 안 된다, 형이 무슨 죄를 졌느냐 반문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사실 오늘 본문, 맏아들의 이야기는 죄의 본질을 적나라하게 보여줍니다. 뭐가 죄입니까? 어떻게 죄를 정의 하십니까?물론 살인, 간음, 탕자처럼 불효하며 재산을 다 탕진하는 것도 죄이지요. 그러나 눈이 보이지 않는 죄도 있습니다. 성경은 아버지의 품, 하나님의 마음에서 멀어지는 것도 죄라고 말합니다.

자, 질문이 이어집니다. 목사님, 맏아들이 언제 아버지의 품을 떠났습니까? 둘째처럼 아비집을 떠남으로써 확실하게 탕자가 되는 방법이 있습니다.

아비집 안에 살면서, 아버지 품을 벗어나는 탕자도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 열심히 신앙생활 하면서도 탕자가 될 수 있습니다.

탕자의 사전적 정의는 ‘흥청망청 가진 재산을 다 써버린 사람’입니다.     둘째 아들이 아주 전형적인 경우이지요.  맏아들은 어떻습니까? 돈은 아니지만, 아버지의 사랑/ 은혜를 가슴에 담고 있었나요? 아니면 둘째 아들처럼 줄줄 다 흘리고 다니고 있나요?

혹시 맏아들의 마음도, 둘째처럼 여기저기 구멍이 뚫려있지는 않나요?

말씀을 묵상하면서, 맏아들이야말로 제대로 된 탕자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겉으로 보면 한번도 하나님 말씀을 거역한 적이 없는 완벽한 율법주의자, 탕자동생을 아랑곳하지 않고 성실히 밭을 갈고 있는 하나님나라 일꾼입니다. 맏아들 마음그릇에는 탕자가 찼던 쪽박처럼 여기저기 구멍이 뚫려있습니다.

첫 번째는 ‘자기 의’라는 구멍입니다.

말로는 한 번도 아버지 곁을 떠난 적이 없다, 아버지 만을 섬겼다라며 자기 의를 내세웁니다. 그런데 실제는 어떻습니까? 단 한번도 동생이 돌아오기 만을 기다리며, 먼 동구 밖에서 고추발로 서 계신 아버지의 마음을 읽은 적이 없습니다. 아버지와 같은 집에 살기는 해도 마음은 늘 밭 [내 재산]에만 가 있습니다. 동생이 돌아온 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버지 보다는 일이 우선입니다. 표면적으로 보면 흠잡을 데가 없는 삶입니다. 열심히 기도하고, 열심히 전도하고, 하나님 나라 확장을 위한 밭 갈기에 정신이 없습니다.

대체 누구를 위해 종이 울립니까?
도대체 누구를 위해 사역하고, 무엇을 위해 신앙생활 합니까?
내 열심이 하나님을 향한 첫 사랑을 덮어 버리지는 않았습니까?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열심이 아니라 ‘사랑’입니다. 그 분을 처음 만났을 때 우리가 꺼내드렸던 그 뜨거운 첫사랑의 마음입니다. 아무리 분주하게 돌아다니고, 열심히 일한다 할찌라도, 아버지의 마음을 읽어드릴 수 없다면, 벌써 아버지 품을 떠난 겁니다. 동생은 집을 떠나 수 천리 길을 갔지만, 맏아들은 집안에서, 바로 아버지 곁에서, 수 천리 길을 떨어져 있습니다. 동생은 집을 제대로 나갔다가 이제 막 돌아왔지만, 맏아들은 제대로 나가보지도 못한 채 아버지 품을 떠나있습니다. 누가, 누구한테, 손가락질을 할 수 있겠습니까?

맏아들의 마음에 뚫린 두 번째 구멍입니다. ‘정죄’라는 구멍이지요.

동생이 돌아왔다는 소식을 듣고 화가 나서 길길이 날뜁니다. 마음 속으로 동생을 몹쓸 놈, 파렴치한으로 이미 정죄했기 때문입니다. 어디 그 뿐 인줄 아세요? 동생과의 연을 아예 끊었지요. 동생이라고 표현하지도 않습니다. 아버지께 따지며, 창기과 재산을 탕진해 버린 당신의 아들이라고 말합니다. 아버지가 곧바로 정정해 주시지요.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아났고, 잃었다가 다시 찾았으니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해야 하지 않겠느냐?

우리는 너무도 쉽게 형제와 자매를 재단질 합니다. 뭐 좀 잘못되면, ‘내 그럴 줄 진작에 알았다니까.’ 성경지식 총동원해서 형제/자매의 실패와 좌절에 대해 주석까지 달지요. C.S 루이스가 옥스포드대 채플에서 설교하고 나왔을 때 한 젊은이가 그에게 다가와서 이렇게 물었습니다. “선생님! 신이 살아 계시다면 설명할 수 없는 고통이 이 세상에 왜 이다지도 많습니까?”  루이스가 대답합니다.  “젊은이, 이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그렇지 않아도 오만하고 교만한데 고통마저 없었다면 얼마나 더 교만하겠는가? 고통은 귀먹은 사람들을 깨우쳐주는 하나님의 확성기라네.” 고통은 당사자뿐만 아니라, 옆에서 지켜보는 사람을 위한 것 입니다. 고통은 당사자와 주변인의 사이에 정죄의 금을 확실히 긋는 것이 아니라, 누가 참 형제인가를 알게 되는 소중한 시간입니다.

‘당신의 자식’이라고 말하지 맙시다.
내 형제, 내 자매라고 말하며, 함께 끌어 안으십니다.
맏아들의 마음에는 자기 의, 정죄의 구멍이 뚫려 있었죠.

마지막 구멍은 하나님의 은총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구멍입니다.

사실 아들은 자기 기준으로 도덕적이 잣대로 하나님의 은총을 해석하고, 창기와 세리를 무시하고 정죄했던 바리세인을 상징합니다. 자기들은 절대로 죄인이 될 수 없다라고 굳게 믿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면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일 자세가 돼있지 않은, 그야말로 집을 나가도 아주 멀리가 있는 탕자입니다. 더 중요한 사실은 자기가 탕자인줄도 모른다는 겁니다.

렘브란트의 ‘돌아온 탕자’라는 그림을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세명이 나와요. 먼저 탕자입니다. 탕자는 아버지 품에 얼굴을 묻은 채 그 뒷모습만 보입니다. 옷은 갈기갈기 찢어졌고, 맨발에 상처투성이 입니다. 그 뒤로 탕자를 안고 있는 아버지는 자애로운 얼굴도 보입니다. 그 옆에 맏아들의 모습이 보입니다. 그런데 맏아들은 탕자와 아버지로부터 조금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얼굴에는 기쁨도 없고, 자기 의에 도취된, 정죄하는 자세로 서 있습니다.

바로 이 한 폭의 그림이 바로 헨리 나우웬의 인생을 뒤바꾸어 놓았습니다. “나 자신은 매우 책임감이 강하고 전통적이며 가정 중심적인 사람이었다. 나는 어쩌면 그 모든 것과 함께 둘째 아들만큼이나 탕자로 살아왔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의 질투심, 나의 분노, 나의 성급함과 완고함과 무뚝뚝함, 그리고 무엇보다도 은연중에 스스로 의롭다고 여기는 나의 독선을 보았다. 나는 분명 큰 아들이었다. 나는 아버지의 농장에서 아주 열심히 일해 왔지만, 집에 거하는 그 기쁨을 전혀 맛보지 못했다. 내가 누렸던 그 모든 특권들을 감사하기보다는 오히려 불평불만의 사람이 되어 버렸다.” 자기 자신이 바로 큰 아들이었다는 충격 때문에 하버드 교수직을 던져 버리고 장애인 사역을 시작합니다.세월이 지나 헨리 나우웬은 다시 렘브란트의 그림에 대해 말합니다.그 그림은 내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설 수 있는 신비의 창이 되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모두 탕자임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미 집을 나간 적이 있거나, 집안에서 불평거리며 아버지의 품을 마음으로 떠났거나, 모두 집을 잃어버린 탕자입니다. 이제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은혜, 어떤 조건도, 단서도 없는 하나님의 은총을 겸손히 받아들일 시간입니다. 집 나간 탕자를 위해 아버지 하나님은 이미 다 용서해 주시고, 마을 어귀에서 이제나 저제나 하염없이 기다리십니다. 성질 부리며 집에 들어오기를 거부하는 큰아들에게도 먼저 찾아 오십니다. 잔치 중에도 잊지 않으시고, 집 밖으로 나오셔서 큰 아들도 사랑해 주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돌아온 탕자 입니까? 아니면 큰 아들처럼 다시 돌아와야 될 탕자입니까? 먼저 믿었다고, 조금 잘 믿는다고 동생 탕자를 정죄하거나, 하나님의 은총에 문제가 많다고 불평하지는 않으셨습니까? 주님께서 오늘 다시 여러분의 주님의 식탁에 초대합니다.

성만찬은 아버지와 나의 관계를 다시 회복하는 시간입니다. 동시에 나와 동생 사이에 놓여있는 자기 의, 정죄의 담도 허무는 시간입니다. 성만찬을 받으시기 전에 여러분 자신의 모습을 정직하게 바라 보세요.

주님은 평화의 사도로 우리에게 찾아 오셨습니다. 이제 저와 여러분이 Peace Maker로 화해의 일꾼으로 일어설 시간입니다. 잃어 버렸던, 잊고 살았던 아버지 사랑을 되찾으십시다. 잃어 버렸던, 아니 내심 죽기를 바랬던 동생을 다시 뜨겁게 품어 봅시다. 

네 동생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잃었다가 다시 찾았으니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해야 하지 않겠느냐?”         아멘. 

 

<적용 질문>

하나. 신앙생활 하시면서 큰 아들처럼 집나간 동생, 탕자를 정죄해 보신 경험이 있으십니까?  그때의 그 느낌/ 그 감정을 솔직하게 나눠 보세요.

둘. 판단이나 정죄는 어떤 마음에서 비롯됩니까? 혹시 내가 바로 아버지 집안에, 교회 안에 있는 ‘돌아와야 될 탕자’가 아닙니까?

셋, 그토록 미워하고 정죄했던 동생을 마음 속에 떠올려 봅시다. 주님의 도우심을 구하며, 화해의 사역자가 되기 위한 기도문을 적어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