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kip Navigation

사진 속의 아펜젤러는 우리나라에 1885년에 입국하여 활동한 감리교 선교사였던 헨리 거하드 아펜젤러의 아들인 헨리 다지 아펜젤러이다.

Previous Next

“아펜젤러 선교 130주년 기념대회”에 다녀와서…

 

작고한 부친의 유품을 정리하다가 낡고 빛바랜 배재학당 시절 아펜젤러 선교사와 찍었던 사진을 앨범에 보관하였었다. 그런데 우리 교회에서 아펜젤러 선교 130년 기념대회를 개최한다는 광고를 접하게 되었고, 부친 시절의 냄새를 맡고 싶은 생각에 모처럼 이층 예배실에 자리 잡았다.
나이 칠십에 혹 하나를 더 달고 살아오는 동안 아펜젤러 선교사에 대해서는 상식적인 정도의 지식 외에는 별다를 생각이 없었지만, 효자 노릇 한번 제대로 못 해보고, 아니 속이나 많이 썩이고 살아온 가슴속의 응어리가 짙게 남아있어 오늘의 참석이 있게 되었던 것 같다.
별다른 감흥 없는 순서가 끝날 무렵 자그마한 체구의 장로 영감님이 등단했다. 92세라는데 볼티모어에서 손수 운전하여 뉴욕엘 오셨다니 대단하단 생각이 잠시 들었다. 그 후 “예수 나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고…” 라는 조모님이 즐겨 부르시던 옛 찬송에 주책없이 뜨거워지려는 눈시울을 누르고 순서를 마치는데 집사람이 속삭인다.
“그 장로님 연세가 작고하신 아버님과 같으니 혹시 배재학당 동기일지도 모르겠네요”해서 친교실에서 찾아뵈었다. 카톡에 찍어놓은 아펜젤러 선교사와 부친이 함께한 것으로 생각했던 사진을 보여드리니 깜짝 놀라신다.
“XXX와 어떤 관계냐?” 라는 물음에 “큰아들올시다” 라고 공손히 대답할 수밖에 없었는데 이는 부친과 동기동창이겠다 싶어서였다. 한국에서 부친과 친하셨던 OOO 씨와 ㅁㅁㅁ 씨 이야기를 드렸더니 너무나 잘 아신다. 비록 말씀은 어눌해도 똑똑한 인지능력에 감탄할 수밖에 없다.
“XXX가 지금 살아 있느냐?”는 질문은 나로 대답하기 힘들게 만들었다. 함께 동행한 젊은 영감님 역시 배재학당 후배이신데, 보여드린 사진을 필히 보내달라고 명함을 건넨다. 알고 보니 배재학교 뉴욕지역 동창회장이라니, 선후배 간 우의가 참 돈독하구나 생각든다. 내 부친의 동기동창 장로님은 그 옛날 아펜젤러 선교사를 파송한 교회의 담임목사 흉상을 제작해 기증했다는 소식이다.
몇몇의 예수 사람을 통해 전해진 복음이 오늘날의 한국 기독교의 기초가 되었고, 이렇게 면면히 이어져가고 있음에 신비함을 느낀다. 어릴 적 유아세례를 받고 소년 시절을 보냈던 교회의 담임목사님이 떠오른다. 평소에 게다짝을 신고 지내셨다. 주일이면 모처럼 양복에 넥타이를 매셨는데, 어린 눈에도 낡아서 후줄근한 양복이 안쓰럽게 보였었다. 목사관 마루에는 커다란 쌀 뒤주가 놓였고 교인들은 물론 다른 직업의 교인들도 쌀을 구매해서 넣어 담임목사 식구들과 배고픈 신도들과 나눠 먹었다. 교회 규모가 당시로는 제법 대형 규모의 교회였다고 기억하는데도 그런 시절이 있었다.
“너희들 이사를 가더라도 감리교회에 나가거라”시던 조모님이 생각난다. 왜 그러셨을까 하고 생각했던 시절이 있었다. 한 분 계셨던 고모님도 이화학당을 보내셨다. 옳은 결론인지는 모르겠지만 “당시의 감리교단은 매우 순수했구나!” 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젊은 아펜젤러가 한국이라는 사지에 뛰어들어 요절(순교)한 뿌리가 오늘날의 우리를 만들지 않았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의 우리들은 어떻게 살고 있는가? 아무튼 오늘의 행사를 통하여 나로 하여금 부친의 냄새를 마음껏 맡게해주신 것에 감사드리며 하나님의 섭리를 깨닫는 시간이었다.

<이 글은 익명을 요구한 한 교우의 글입니다.>

올린날: 2016년 1월 25일,  연합감리교회 공보부, TN